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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이완? 혹은 대만.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묻는다.

"아시아 어디어디 가봤어?"

이런 질문에 가끔 교만해 질 때가 있다. 호기넘치게 이렇게 대답해본다.

"대충이지만 거진 다 가보긴 했지. 특히 중국은..." (호자이)

"대만도 가봤어?"

"헉.......아직..-_-...."(호자이)

대만이 독립국가이냐 아니냐를 논하려는 게 아니다. 이제껏 대만이 나를 유혹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 자문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대만은 너무 작다. 게다가 이제껏 중국 일부로 여겼을 런지도 모른다. 대만 고유의 것이 없다는 인상을 받았고, 심지어 홍콩 영화는 봤어도 대만 영화나 노래 드라마는 기억에 나지 않는다(그나마 꽃보다 남자가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비정성시는 꼭 봐야할 리스트에 있긴 했지만 안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가만히 대만과의 연관성에 대해 회상해 본다.


  • 1980년 우리 집안(어머니)의 첫 해외여행지. 대만에서 사오신 과자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 어릴적 한 동네에 살던 산동성 출신 화교는 자신의 국적을 '타이완'이라고 말했다.
  • 내가 처음 탔던 스쿠터 'CUXI'는 대만제였다.
  • 한때 대만제 GAINT 자전거를 사고 싶었다.
  • 1999년 미국 어학연수를 갔는데, 이쁘장한 대만 아가씨를 만나고 신선한 충격을
  • 대만제 컴퓨터 부품을 썼다.
  • ...... 

대만, 특히 타이페이는 지금까지 내가 다녀봤던 도시들 가운데 가장 한국과 닮아 있었고 문화적 DNA도 흡사했다. 일본과 대만 가운데 한국과 더 가까운 나라를 찍으라면 주저않고 대만을 선택해도 될 정도였다. 적어도 내게는 말이다. 진정으로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일본보다 대만이 아닐까?


#2. 그러니까 10년도 훌쩍 지난 얘기다.

내가 미국에 잠시 거주하며 아시아에서 건너온 적잖은 아시아인들을 만나던 1999년의 얘기다. 당시 내가 다니던 토플 고급반에는 뛰어난 학생들이 많았느데, 당근 성적 상위권은 아시아계가 휩쓸었다. 물론 실전 영어는 훨씬 못했음에도, 중남미계 아이들은 토플 500점도 못넘겨 헤메고 있었지만 일본이나 싱가폴 한국에서 온 좀 젊은 학생들은 간단하게 550점을 넘겼고, 목표를 600점 이상으로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한동안 600을 노리던 학생이었는데(600점이 넘는다면 학원에 다닐 필요가 없지-_-), 당시 세력은 일본인들을 위시한 일본-대만-싱가폴 라인과, 한국-중국-말레이 기타등등으로 양분됐다. 아마도 제1세계와 제 2-3세계의 구분인 듯 했다.

문제는 대만이었다.

우리반의 예쁘장한 대만 아가씨는,(아마도 당시 나이 22살 정도) 우리 한국-중국 남정네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더랬다. 그리곤 샌님같고 조폭같은 일본 사내들 무리에 끼어 매일같이 어딘가를 쏘다녔다. 물론 우리도 그런 일빠에 고운 눈길을 준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행동은 좀 심한 바가 없지 않았다.

심지어 독일이나 일본에서 온 여학생들도 우리 패거리들과 잘도 얘기하고 인사도 나눴지만, 그 대만 아가씨는 등교에서 하교까지 언제나 일본남정네 무리 밖을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에게 일본은 꽤나 중요한 관계인듯 보였고, 실제도 그러했나 보다. 난 아직도 가끔, 이쁘장한 복장과 중국인 특유의 귀여운 표정을 짓던 그녀가 가끔 떠오른다. 물론 '일빠로서의 그녀'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타이페이의 따거 민박 / 하룻밤 400대만달러


 















대만에서의 첫밤은 이 따거민박에서 지내기로 마음을 먹다.

타이페이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 민박집이다.(운영은 대만 택시기사가)
홈페이지에서 이 사진을 보는 순간, 내가 묵어야 할 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저 앞에 세워진 대만야마하의 쿡시가 바로 내가 탔던 모델이기 때문이다.
때론 여행은 이렇게 운명적이다.



PS. 대만은 세계적인 스쿠터-자전거 강국이다.

물론 그렇게 된 배경에는 역사적 산업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다름아닌 일본에 종속된 산업 구조, 전자와 자동차의 부품산업 기지, 라는 조건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한 결과물이기 다름아닌 스쿠터 산업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적극적으로 대만의 부품산업을 키웠고 결과적으로 대만과 일본은 하나의 내수산업기지 혹은 해외수출 산업 기지로 성장했다. 우리도 일본과 그런 관계가 조금 남아있지만 규모적으로 대만보다 2~3배 크기 때문에 조금 다른 문제.

현재 대만은 세계적인 바이크 강국이다. 그런데 첫 날 대만을 돌아보니 바이크의 특징이 대만과 매우 유사하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 1년 내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
  • 매우 실용적이다. 빠르고 기동성도 좋다.
  • 그러나 사고가 나면 매우 위험하기에, 운전중 인근 자동차의 행보에 주의해야 한다.
  • 유지비가 적게들지만 법적인 보호를 받기 힘든 면이 없지 않다.
  • 작고 예쁘다.
Posted by hojai.

요녕성 7일차


압록강 앞에서 발길을 멈추다

 





압록강에 대한 이미지는 조금, 아니 상당히 패배적이다.

위화도 회군 때문일까?

혹은 조금은 야만스럽다는 압록강 너머의 외적 때문일까.

우리는 여전히 압록강 이남만이 한국, 혹은 조선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국 대륙을 돌아 압록강 반대편에 섰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중국이고, 저 안쪽이 조선인데....그 조선은 쉬이 갈수도 만질수도 없는 땅.


당초 나란 존재는 압록강을 너머 중국을 바라봐야 하는 게 정상인데,

얄궂은 역사가 나의 위치를 강 건너에 위치시키고 말았다.



단동역 앞 마오쩌둥 동상은 다행스럽게도 서쪽, 베이징을 향해 있었다.

동남쪽 평향을 향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던지.


단동 2일차는 날이 환하게 개었다.

물론 그럼에도 기온은 여전히 영하권에 맴돌고 있었다.

아침부터 짐을 챙겨 단동 구경에 나섰다.


잠시 버스를 타보기도 했는데, 워낙 좁은 동네다.

마음을 바꿔 걸어서 횡단해 보기로 했다.

 


단동역 앞의 재개발(?) 구역.

2003년 이후 중국을 다녀본 나로선 가장 흔하게 본 풍경이다.

중국의 어느 도시나 중앙으로 진입해 보면 이 같은 모습을 마주칠 수 있다.

1950년대 지어졌을 법한 붉은 벽돌의 군수시설 같은 건물들이 무너지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아마도 단동의 도심도 머지않아 미끈한 빌딩들이 들어설 것이다.

 


내일 2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아침일찍 다롄으로 떠나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버스표가 충분했다.

문제는 시간.

오전 5시 6시 8시 이렇게 버스가 운행하고 있었던 것.

6시는 너무 빠르고 8시는 너무 늦어 불안했다. 어쩔 수 없이 6시 버스표를 끊었다.

80위안.

만 하루를 남기고 지갑을 털어보니.

1200위안에서 시작한 돈이 180위안으로 줄어 있었다.

민박집 100위안을 내고 나면 이제 80위안이 전부이구나.


한켠으로 대견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자. 어찌됐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마지막 행선지인 압록강으로 향했다.

단동역에서 압록강까지는 불과 500m에 불과하다.

 


저 멀리 압록강 철교가 보이기 시작한다.

압록강의 중국어 발음은 <야루쟝>이다.


막 결혼식을 끝마친 이들이 차량을 타고 압록강변 파티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결혼식을 화려하게 치룬다는 중국인 얘기를 많이 들어봤지만,

외제차 10여대를 동원한 풍선 연출은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게다가 여기는 압록강변이 아닌가?



드디어 압록강변에 섰다.


어제 종일 꿈꾸던 이미지와는 판이했다.

사실 압록강의 첫 인상은 너무 우중충했다.

그러나 오늘은 햇살이 눈부시게 밝았고,

강변에 부딛힌 잔물결은 햇살을 머금고 켜켜히 부서졌다.

한 마디로 아름다왔다.

콘크리트로 뒤덮힌 한강을 바라보다 압록강을 접하고 나니

순수했던 어린시절로 되돌아 가는 느낌이었다.


누군가는 그물로 고기를 잡고 있었고,

누군가는 한가로이 강변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도 그들 무리에 섞여 담배 한까치를 꺼내들고 상념에 잠기다.

(물론 그렇다고 무슨 심오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압록강이 너무 아름다왔다는 것)



자세히 살펴보면 압록강 철교가 2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에서 본 사진은 현재 단동과 신의주를 잇는 다리고,

압록강 단교로 알려진 이 철교가 바로 6.25 와중에 미국 조종사의 오폭으로 반파된 바로 그 다리다.


이 다리는 현재 관광객들을 위한 아주 좋은 상품으로 팔리고 있었다.

40위안을 내면 누구라도 북한의 비자 없이 거의 북한의 영토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리 절반위에서 느끼는 감정은 조금 새로울까?


무려 한 시간 가까이 이 단교 근처를 배회하며 고민했다.

40위안을 (사실 가격에 대한 기억이 확실치 않다) 지불하고 이 다리에 오를 가치가 있을까?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다음에 가자"였다. (기념으로 셀카 한 장)


사실 압록강 주변을 배회하며 내가 이곳 단동에 오기까지의 과정이

그리 진지했던 것은 아니다는 반성을 하던 차였다.

별다른 고민 없이 우연히 단동에 당도한 것이다.


물론 비싼 입장료에 대한 반발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돈이 없었다

-_-



시간이 지날 수록 압록강변에는 중국인 관광객들도 적잖이 몰려왔다.

모두들 나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철교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야루쟝 이라고 씌여진 비석 앞에서 감격해 했다.


글쎄 그들이 느낀 감격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이 곳이 조-중 국경이구나. 이 곳이 바로 중국의 끄트머리구나" 하는 생각이 아닐까?


그러나 나 같은 반도 출신에게 다가오는 감정은,

이 곳은 아직 세상의 끝이 아니라는 것,

앞에는 또 다른 원더랜드가 존재할 것이고,

반드시 이 강을 건너야 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한 중국인 처자가 내게와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너무도 친절하게도 강변에는 <중-조 변경, 단동 압록강>이라는 표식이 적잖이 보였다.

그리고 너머에 보이는 산뜻한 표정의 북한 건물들.


여담이지만, 단동에서 바라보는 신의주는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같이 정갈하고 고풍스럽다.

당장이라도 강을 건너 신의주 어느 예쁜 테라스 커피숍에서

왈츠를 들으며 커피 한 잔을 기울일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다.


물론, 북한의 지도자들이 단동에서 보이는 북한의 이미지를 파악하고

얼마나 극진히 관리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별다른 생각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대학시절 독일로 건너가 활동했다는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는 소설을  떠올려보기도 했지만.

나는 불행히도 그 책을 완독하지 못했다.

그저 이미륵이란 이름만을 한 켠에 저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 없이 이 강을 건넜을 북조선 동포들과,

혹은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와

고조선-고구려를 건국한 아주 오래전 조상들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잘 알려진 얘기지만 압록강은 고구려의 중심이었고, 언제나 민족사의 중심에 존재해왔다.


조약돌을 하나 집에 여행 가방에 챙기다.

언젠가 신의주를 통해 이 곳 단동에 오리라 마음을 먹었다.




압록강을 떠올리다 보니 문득 조선말이 듣고 싶어졌다.

아니 미칠듯이 조선음식이 먹고 싶었다.


그리하여 강변에 있는 삼천리라는 북한 식당에 찾아 들어갔다.

놀랍게도 이곳의 북한 여성들은 하나같이 통통하게 살이 올라있었다.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쳐다보니 일주일째 고생했던 탓인지 핼쓱했다.


그렇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그리 흥미롭지 않았다.

아마도 그녀가 보기엔, 나는 평범한 관광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일 거다.

그녀에게 천편일률적인 북한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려다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그 열정을 주문으로 승화시키기로 마음먹다.


곧장 짠돌이 모드를 포기하고

이 곳의 특산물인 야루쟝 맥주를 주문하다.

개고기탕을 하나,

그리고 돼지 머릿고기 무침까지 주문했다.



여행의 든든한 동반자.

요녕성 정보를 제공한 롤니플래닛, 그리고 든든한 보호막 모자, 시계와 알람용 핸드폰, 그리고 담배 한갑



배는 불렀지만


주머니 속의 돈이 거진 비어갔다.


돈이 다 떨어지면서 내 여행도 끝이 났다.


내 여행이력의 또 다른 한 페이지가 씌여진 셈이지만,

왠지 모르게 마치 중국 담배 종난하이 처럼 이번 여행의 맛은 무겁고 살짝 독했다.




다음날 새벽, 5시에 기상해 6시 버스를 탔다.


중국 버스여행은 언제나 힘겹다.

좁은 좌석과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떠들어 대는 비매너 여행객들,

그리고 도대체 어디쯤을 지나치고 언제 내려야할지 모르는 정보의 단절까지.

......가장 중요한 점은 아침밥을 못먹은 상태에서 거진 11시가 됐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집에 돌아간다는 사실에 조금은 흥분이 되기도 했다.



4시간만에 도착한 대련.

버스를 타고 다시 중산광장에 도착했다.

일주일만에 다시 도착한 대련에는 물씬 봄의 향기가 풍겼다.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무척이나 기분이 상쾌해졌다.



한 무더기의 비둘기가 후루룩 날기 시작했다.


아....배가 너무 고파 속이 쓰리기 시작했지만, 비둘기의 군무에 잠시 넋을 놓고 바라봤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만일 내가 이 곳 대련에서 산다면 무엇을 하고 살 수 있을까?

예전에는 불가능할 것만 같은 일들이 성큼 현실로 다가온 듯 싶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하다니.



돈이 없는 관계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다.

공항 근처 식당에 들러 8위안짜리 니로우미옌을 시키다.


이번 여행 마지막 식사가 되겠다.

너무도 자주 먹은 음식이지만 이번 여행에서 가장 잊지 못할 존재가 되고 말았다.



봄이 찾아온 대련공항.

아뿔사 1주일만 늦게 왔으면 편하게 여행했을 텐데.

반대로 생각하면, 1주일만 늦게 왔으면 요녕의 겨울을 못봤을 뻔 했구나.


다행이다.


다. 행. 이. 다.



게다가 돈도 부족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중국 핸드폰에 충전했던 50위안을 미처 다 사용하지 못했다.

비행기를 기다리며 베이징의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하다.

그네들의 대답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 추운 요녕을 혼자 다녀오셨다고요?"


"네. 그랬습니다. 정말 추웠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미있었어요."(호자이)



=========================요녕성 여행기 연재 마칩니다(호자이)

Posted by hojai.

요녕성 여행기<7>---단동의 3억 아파트, 그리고 압록강

단동의 3억 아파트에서 압록강을 내려보다



중여동(중국여행동호회)란 중국 여행사이트가 있다.

이곳에 가면 중국 거의 모든 지역의 민박집을 찾아볼 수가 있다.

문제는 검증이 안된다는 점이다.


단동의 민박집을 수소문하면서도 이 점이 제일 고민이었다.

사실 제대로 된 민박집을 구하는 일은 1박2일 복걸복에 나오는 수준이었다.


5여개의 민박집 주소를 잡아들고

단동으로 향하다.

어느 하나라도 걸리는 곳으로 가겠다는 계산이었다.


그 가운데 이런 광고가 눈에 띈다.

    =====================한국모텔(민박)=====================


    요녕성 단동 동강시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집 민박을 소개 드립니다.

    단동동강시는 한국분들이 배낭여행.사업가 등 배를 타고 중국 요녕성으로 제일 많이 오시는 곳이지요.  


    단동은 북조선 신이주와 한강차이에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예요.

    그리고   옛날의 고구려때의 유전지인 도시 지안 통화 등 곳에 가기는

    교통도 아주 편리한 곳이지요^-^


    많은 여행자들이 단동으로 거쳐서 가거든요.

    ............

    저의 집은 민박을 운영한지 만5 년이 되였어요.

    운영하는 아바트 두채입니다.


    최고급 인테리어 장식 따뜻하고 분이기 좋는 방

    중국 평수로 140평(한국 평수 43평),  120평(한국 평수 35평) 이렇게 아바트 두채를 사서  민박집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동에서 제일 깨끗하고 한국분들이 중국에 요서서 제일 편안하게 쉴수있는민박집이라고 보장할수 있습니다.


    단동으로 배를 타로 오실때 자주 타는 분들에게 물어보시면 저의 집을 아실거예요


    특이 어머님이 맛이 좋은 한국음식을 3식 재공하고 커피 과일도 재공하지요. 그리고 매개 방마다 위성 방송도 설치 했구요. 하루종일 따듯한물 잘나오고 24시간 손님이 필요하시는 대로 문앞까지 택시도 대기하고 특히 손님들 신변 안전은 일부러 사고 치지 않는 이상 확실하게 책임집니다~ ^^  

    .....................


이 광고의 마지막에는 이런 대목도 있었다.


"압록강이 바로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경치"


과연 진짤까?




단동역에서 불과 500m 정도 향하니 곧장 압록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게 압록강이라니...


5개의 민박집 주소를 갖고 있었다지만 3개는 이미 끊긴 전화였다.

이 곳의 경기도 그리 안정적이지 못함을 보여준다.

결국 고민끝에 위에 광고에 나온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실 과장 광고라는 의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전화를 받은 사람은 거친 목소리의 성인 남성이었다.

애당초 광고에는 젋은이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는데.....당황했지마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설명에 따라 택시를 타고 어느 아파트로 향했다.



한참 개발중인 단동시내 압록강변


택시를 타고 단동을 가로질러 가는 길은 조금은 으스스했다.

아무래도 눈이 내린 탓도 있겠지만, 겨울철 중국의 거리는 한산하다 못해 마치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게다가 중국 아파트들은 딱히 관리실이 있는 것도,

제대로 된 대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택시에 내리고 나니 한 아주머니가 나를 맞이한다.

그를 따라 십삽층 아파트로 올라가다.



와.... 대박이다.


사상 처음으로 맞이하는 대박 아파트, 대박 민박집이었다.

육십평. 오호라. 압록강이 바로 눈앞에 보인다. 이런 대박이....

3일간 못씻은 몸을 깨끗이 닦아 내다.

선양의 같은 가격 민박집과 비교하니 마치 천국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점심밥을 차려주시는데... 이 또한 꿀맞이다.

이 때 민박집 아들이 도착한다. 아들까지 훈남이다.

이 친구가 광고글을 올린 주인공이구나.  말이 통할 것 같다.



방이 5개인 대형 아파트.

방음이나 난방은 시원치 않았지만 인테리어는 최신으로 꾸민 집이었다.

놀랍게도 이 집의 위성방송에서는 성인방송까지 나와 투숙객들을 기쁘게 했다.



광고 그대로였던 압록강 전경.

날씨가 좋지 않아 멀리 보이진 않았지만

아파트에서 북한의 모습이 그대로 내려다 보이는 광경은 마치 전망대를 연상케 했다.


압록강의 규모는 한강과 비슷했다.

아니 조금 작았을까?

강남에서 강북을 내려다 보는 모습과 흡사했다.


압록강이 이리 평범할 줄이야...

민박집에 비치된 망원경을 가지고 이리저리 압록강 주변을 관찰하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본 강변 풍경.

위성방송 안테나가 인상적이다.


"그거 알아요? 동북3성에선 위성방송 안테나가 달려 있으면 바로 조선족이 거주한다는 얘기에요.

조선족이라면 모두들 한국 방송 보려고 위성 안테나를 달았거든요."


때문에 아파트를 겉면에 설치된 위성방송 안테나 만으로 조선족 비율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아파트 뒷편으로는 '한국성'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만 단동시내의 모습이 기대했던 것보다

무척 깨끗했고 도회적이었다.



한국모텔의 젊은 사장 A모씨.

그는 생김새와 달리 20대 후반의 쾌남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민박업과 여행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결혼을 목전에 두고 있어서인인지 그는 연신 인테리어 검색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단동에 자리잡고 집안이나 인근 고구려 유적 전문 가이드였다.

방송은 물론 여러 언론사 기자들을 데리고 가이들르 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람들 거의 안와요. 와서도 싸다는 말 더 이상 안하네요."


그가 먼저 선수를 치자 내가 머쓱해졌다.


내가 단동에 도착한 날은 1위엔에 260원이 깨진 날이었다.(지금은 190원 이하)

자연스럽게 화두는 경제가 됐다.

그는 위안화에 투자해 떼 돈을 번 한국 사람이나 조선족도 많다고 얘기했다.

자신도 이렇게 오를줄 몰랐다고 아쉬운 목소리다.


"아파트값 여기 단동만 해도 백만위안 가까이 해요. 평당 만 원짜리 아파트도 등장했고요.

우리가 사는 200평 아파트요? 이거 백만위안 훨씬 넘죠."


허걱. 중국의 가장 변방인 단동의 아파트가 (물론 60평대이긴 하지만, 환율 크리가 있긴 하지만)

2억 6천을 넘어 3억원에 이르다니.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와의 얘기는 인근 양로추알 집으로 이어졌다.

사진에 보이는 조개는 압록강변에서만 난다는 단동특산 조개였다.


그는 여느 조선족 젊은이 처럼 단 한번도 한국에 와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큰 흐름 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조선족 경제가 한국 경제에 종속돼 있기 때문에 한국이 잘살아야 조선족도 잘산다"는 것


그의 가족은 완전하게 한국사람을 상대로 한 것이었고

10년간 누렸던 호황이 장기불황으로 이어질까 걱정하고 있었다.

때문에 여행업 의존도를 줄이고, 본격적인 무역업으로 어떻게 전환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래도 북한하고는 거래 안하려고 합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여기 단동에서

북한사람 신뢰하는 중국사업가 하나도 없습니다. 조금 무역하다가도 결국은 다 사기치고 잠수타거든요.

일단 북한에 가서 돈받아올 재주 있는 중국 사업가는 단 하나도 없지요.

중국인을 상대로 돈떼어먹는 사람은 전 세계에 북한 사람이 유일할 겁네다.

나도 중국이나 한국과 사업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의 얘기를 듣고 나니 북한 사업가들이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집으로 돌아오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날이 맑게 개었다.

압록강이 더욱 아릅답게 빛이 났다.



어찌저찌 글을 쓰다보니 무슨 광고글처럼 됐는데,

나에게 이번 단동행은 일종의 보너스 같았다.

운이 좋게 깨끗한 민박집에서 편히 쉬게 됐음을 감사히 생각하며

조근조근 압록강을 구경하기로 마음먹다.

Posted by hojai.

요녕성 6일차

단동 도착, 그리고 '캉메이위엔차오지니엔관'

                      抗美援朝記念館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기다.

민박집 아주머니 역시 일찍 일어나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_-

내가 돈 떼어먹고 도망갈 위인으로 비쳤나?

그럼에도 아침밥은 챙기지 않았다. 꽤씸했다.

(사실 심양에 머문 3박4일 동안 민박집에선 단 한번 밥을 먹었을 뿐)


기차표 46위엔+기차 대행료 30위엔+마지막 3일째 민박료 100위엔

총 176위엔을 받기 위해

새벽 6시30분에 나를 기다렸던 것.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고나자 분노가 폭발했다.


"이런 민박집이 하루 100위안이라니 말도 안되요. 깎아 주세요."(호자이)

"내 맘대로 못깎아 드려요. 아저씨 허락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주무시잖아요"

"어쨌든 100위안은 절대 못드리겠어요."(호자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원래 1인당 70위안이니 그것만 내세요."


허걱. 세상에 무슨 이런 계산법이 있단 말인가?

그럼 엊그제 드렸던 이틀 200위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헉!! 안되겠어요. 조금 더 깎아 주세요. 갑자기 억울해 지네요."(호자이)


이 때 들려온 방안 아저씨의 목소리.

"여기서 멀 더 깎아! 그럼 기차표를 공짜로 끊어 달라는 건가?"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심양북역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선 3일 동안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은 조선족 아저씨의 목소리가 줄곧 귀에 맴돌았다.

그의 말 하나에 절절 매는 아주머니를 보며

조선족 사회 역시 심하게 가부장적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민박집 운영은 전적으로 아주머니 몫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에 있어 그녀는 아저씨에게 그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많이 씁쓸해졌다.

중국과 대비되는 한국문화의 특성이 고작 가부장제라니...



단동으로 향하는 기차는 편안했지만 지나치게 빨리 출발했다.

7시20분 출발을 위해 새벽부터 진을 빼야했다.

물론 내가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조선족 박씨 어르신과 작별을 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와의 만남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대신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90위안짜리 담배 한 보루를 남기고 오다.


기차 안에선 두 할머니께서 3시간 이상 중얼거림에 시달리다.

덕분에 단잠은 커녕 두 분의 소음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 소화해야 했다.



기차는 4시간 만에 단동에 도착하다.

아주 평범한 여행이었다.

이런 밋밋한 행로도 거의 처음이었다.

나의 지루함을 파악했던지 하늘에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단동역은 너무나 미끈했다.

세련된 건축물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단동이라고 새겨진 붉은색 글씨가 인상적이다.

단동의 옛 지명은 안동, 그런데 어느순간 붉은 뜻이 주어졌다.


 


넓디 넓은 광장엔 마오쩌둥 동상이 서있었다.

허헛. 이것 참.

중국에서 마오쩌둥 동상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곰곰히 짱구를 굴려봐도 마오쩌둥 이 처럼 거대한 마오쩌둥 동상을 본 일이 없다.

'아니, 이 중국 친구들이 북한 영향을 받은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그 해석 보다는 이 해석이 맘에 들었다.


"여기까지 확실하게 중국이다. 조선은 단동을 넘보지 말라.

바로 이 마오쩌둥 동상이 천년만년 이를 증명할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자의적일지도 모른다.



어렵사리 도차한 단동 민박집에서 찰칵.


(-----단동에서 민박집을 구하게 된 사연은 다음 기회에)



어느새 눈은 폭설이 됐다.

단동과 압록강은 안개에 가려졌다.

오후 2시.

민박집 아주머니께 길을 묻다.


"아주머니 이렇게 폭설이 오는데 어딜 가야 할까요?"(호자이)


"단동엔 왜오셨소?"


"글쎄요..."


"북한을 보러 왔다면 압록강에 가야 할테고, 중국을 보러왔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을 가보시구려:"


아! 맞다.

조창완 선배도 말한, 바로 그 기념관.

눈도 오니, 오늘은 거기 가서 놀자꾸나.



택시를 타고 가볍게 "취, 캉메이위엔차오 지니엔관"이라고 말한다.


캉메이, 라는 말이 가볍고 듣기 좋다.

항미원조라는 말을 듣는 순간, 6.25전쟁이 떠올랐다.

아, 중국인들에게는 6.25의 명분이 바로 이 것이었구나.


전시장의 모습은 마치 평양의 현대적인 건축물을 연상케 했다.

단동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 자리잡은 위치가 인상적이었다.



정전협정.

우리가 잊고 있었던 바로 그 문구.

명백하게 한국인이라면 세계제 2차대전과 6.25가 만든 비극과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아직도 한반도에 전쟁이 완전하게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잊고 있던 전쟁이 엉둥하게 단동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실 요녕성 여행을 계획했을 당시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인민해방군의 용맹스러운 표정과 기상.

벽을 뚫고 나와 금새 압록강을 건널 것만 같다.


항미원조기념관은 매우 흥미롭게 구성돼 있었다.

적잖은 전쟁기념관을 경험한 내게도 너무도 낯설고 흥미로왔다.


따져보니 6.25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기념관은 국내에 없었다.

용산의 전쟁기념관 정도인데, 단동과 비교해 보니 천양지차다.



어디서든 마오쩌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에 등장한 1950년의 마오와 인민해방군은

활기차 있었고, 혁명 정신으로 충만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봉건제도를 담박에 해치울 것 같이 보였고,

대신 그 사진에 등장한 조선 인민의 표정은,

너무도 가련했고, 연약했고, 무력했다.


 


언젠가 6.25관련 자료집에서 봤던 한 아기업은 할머니.

내 기억으로 이 할머니는 미군이 주민들에게 해를 끼쳤다는 하소연을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했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진위여부를 떠나,

이 기념관에 전시된 거의 모든 전시물에는 조선이란 나약한 어린이와 부녀자로 묘사가 됐다.

북한 군인에 대한 사잔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조선 인민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인민해방군


예를 들어 이런식이다.

인민해방군은 철저하게 조선을 돕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남조선 출신에서 보면 조금은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비되는 중국 여성의 당당한 사진.

사실 이 사진은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국정 사회교과서에 실린 아주 유명한 작품이다.

예전에는 깃발에 씌여진 글자를 알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비교적 선명하게 해독이 된다.


"어머니, 우리는 조국과 평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보위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중국 여성과 아이가 당당한 사진을 골랐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중국 인민들은 당당하게 이 전시관을 통해 선언하고 있었다.


"중국은 중국 인민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분연하게 떨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캉메이위엔차오, 인 셈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국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선수를 친 셈이다.



대한민국 제1사단인 수도사단의 맹호깃발.

6.25 전쟁 도중 혜산진까지 진격한 맹호부대 깃발을 노획해 이 곳에 전시하고 있었다.


이 깃발은 내게는 너무도 특별할 수 밖에 없다.

바로 나는 남조선 최강의 부대인 수도기계화보병, 일명 맹호부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제대한 부대의 깃발을, 중국의 단동에서 보는 기분은.


^^;

괜시리 침울해 지고 전에 없던 진지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정말 장난이 아닌 상황이군하"




인민해방군이 조선반도에서 물러가면서,

조중우애를 기념하라는 뜻에서 북조선의 노동자들이 전달한 기념품들.


이 같은 깃발 수 백여점이 전시돼 있었다.

론리플래닛에서도 이 대목을 집중 거론하기도 한다.

"캉메이~기념관에 가면 조선어로 된 삐라와 깃발이 많다"


물론 한국인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조선어가 아니었다.



김일성의 사진과 글귀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중국에 대한 고마움과, 조선과 중국 인민이 영원히 공존 번영하자는 내용이다.

김일성에 대한 논평의 나의 능력치를 넘어서는 대목이기 때문에 패스한다.



 


중국인민군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물.

각 출신 성멸 희생자 숫자가 원 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최종 희생자는 바로, 183108........................무려 18만 3108명이 한반도에서 목숨을 바쳤다.


6.25전쟁은 중국이 치열한 내전을 끝마지고 공산당 정부를 만든지 불과 3년만에 치룬 대전쟁이었다.

신생국가였음에도 단시간에 국력을 모아내 연인원 300여만명을 조선 반도에 투입했다.

바로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을 막아서기 위함이었다.


어찌됐던 미국을 만주 이남에서 막겠다는 중국의 목표는 성공을 거뒀고,

억울하게도 한반도는 38선 근처에서 봉합이 됐다.


6.25란 어설프게 봉합됐던 동북아 정세를 다시한번 매조지 하는 전쟁이었고,

쏘련과 중국 Vs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의 강력한 맞부딪힘의 결과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 체제로 굳어졌다.


억울한 것은 물론 우리 민족이다.


강대국들에게 고스란히 전쟁터를 제공해 준 셈이 됐고,

400여만명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전쟁으로 희생됐다.


약 20만명을 희생한 중국과 미국은 비교적 확실한 대가를 챙긴 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민족간의 치열한 갈등과,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국내의 이념 잔재.

그리고 남북한에 남은 그 후손들의 아픔들....




기념관 3층에는 마치 전쟁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끔

조선 전쟁의 중요 포인트가 그림과 미니어처로 실감나게 전시되고 있었다.


이를 배경삼아 사진찍는 관광객들 틈바구니에서

넋을 놓고 6.25를 구경하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인민군 조형물과,

마오쩌둥의 6.25 출정 명령.

이를 설명하는 안내원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아. 참.

그리고 이 기념관 역시 올림픽 이후 공짜가 됐다는 소식이다.

그 덕분인지 관람객이 눈발에도 불구하고 꽤 많았다.

물론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그리고 이 기념관 앞에는 단둥과 압록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초거대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알고보니 이 위치는 중국인민지원군 총본부인 13병단 유지라고 한다)

높이가 53m라니 왠만한 20층 아파트 높이다.

탑 정면에 새겨진 글귀는 등소평이 쓴 글씨 란다.


그냥 돌탑이 아닌 사람이 올라갈 수 있고, 내부가 전시실로 설계된 탑이란다.

내가 간 날은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비바람으로 단동 시내가 내려보이지도 않았다.



아쉬운 김에 기념촬영 한 컷.

만감이 교차하는 기념관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중국이 앞으로도 항미원조 열심이 하면 좋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안했으면 더욱 이상적이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다"


어떤 국가나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미사여구를 동원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패배하지 않았다면 금상첨화다.

6.25는 중국에게 너무나 많은 명분과 실리를 준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부러운 대목은 남의 나라 전쟁에 참가하면서....


위대한 혁명정신을 수호하고,

봉건해방 정신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

그리고 국토를 보위하고

더불어 제국주의에 대항해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심지어 혁명 동지인 북조선을 돕겠다는  

최강의 명분들을 독식해 버린 것.



캉메이위엔차오 기념관을 나오는 순간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마도 단 두 가지일 것이다.


'초. 라. 함'


그리고 그 6.25를 전혀 몰랐다는 나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일 것이다.

Posted by ho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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