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녕성 6일차
단동 도착, 그리고 '캉메이위엔차오지니엔관'
抗美援朝記念館
새벽에 일어나 짐을 챙기다.
민박집 아주머니 역시 일찍 일어나
돈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_-
내가 돈 떼어먹고 도망갈 위인으로 비쳤나?
그럼에도 아침밥은 챙기지 않았다. 꽤씸했다.
(사실 심양에 머문 3박4일 동안 민박집에선 단 한번 밥을 먹었을 뿐)
기차표 46위엔+기차 대행료 30위엔+마지막 3일째 민박료 100위엔
총 176위엔을 받기 위해
새벽 6시30분에 나를 기다렸던 것.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고나자 분노가 폭발했다.
"이런 민박집이 하루 100위안이라니 말도 안되요. 깎아 주세요."(호자이)
"내 맘대로 못깎아 드려요. 아저씨 허락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주무시잖아요"
"어쨌든 100위안은 절대 못드리겠어요."(호자이)
(잠시 생각하더니) "그럼 원래 1인당 70위안이니 그것만 내세요."
허걱. 세상에 무슨 이런 계산법이 있단 말인가?
그럼 엊그제 드렸던 이틀 200위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헉!! 안되겠어요. 조금 더 깎아 주세요. 갑자기 억울해 지네요."(호자이)
이 때 들려온 방안 아저씨의 목소리.
"여기서 멀 더 깎아! 그럼 기차표를 공짜로 끊어 달라는 건가?"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심양북역으로 향했다.
택시 안에선 3일 동안 얼굴 한번 비치지 않은 조선족 아저씨의 목소리가 줄곧 귀에 맴돌았다.
그의 말 하나에 절절 매는 아주머니를 보며
조선족 사회 역시 심하게 가부장적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다.
사실 민박집 운영은 전적으로 아주머니 몫이었다.
그러나 돈 문제에 있어 그녀는 아저씨에게 그 어떤 영향력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많이 씁쓸해졌다.
중국과 대비되는 한국문화의 특성이 고작 가부장제라니...

단동으로 향하는 기차는 편안했지만 지나치게 빨리 출발했다.
7시20분 출발을 위해 새벽부터 진을 빼야했다.
물론 내가 새벽에 출발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조선족 박씨 어르신과 작별을 고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와의 만남은 조금 부담스러웠다.
대신 그에게 감사의 표시로 90위안짜리 담배 한 보루를 남기고 오다.
기차 안에선 두 할머니께서 3시간 이상 중얼거림에 시달리다.
덕분에 단잠은 커녕 두 분의 소음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 소화해야 했다.

기차는 4시간 만에 단동에 도착하다.
아주 평범한 여행이었다.
이런 밋밋한 행로도 거의 처음이었다.
나의 지루함을 파악했던지 하늘에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예상과 달리 단동역은 너무나 미끈했다.
세련된 건축물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단동이라고 새겨진 붉은색 글씨가 인상적이다.
단동의 옛 지명은 안동, 그런데 어느순간 붉은 뜻이 주어졌다.

넓디 넓은 광장엔 마오쩌둥 동상이 서있었다.
허헛. 이것 참.
중국에서 마오쩌둥 동상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곰곰히 짱구를 굴려봐도 마오쩌둥 이 처럼 거대한 마오쩌둥 동상을 본 일이 없다.
'아니, 이 중국 친구들이 북한 영향을 받은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니, 그 해석 보다는 이 해석이 맘에 들었다.
"여기까지 확실하게 중국이다. 조선은 단동을 넘보지 말라.
바로 이 마오쩌둥 동상이 천년만년 이를 증명할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자의적일지도 모른다.

어렵사리 도차한 단동 민박집에서 찰칵.
(-----단동에서 민박집을 구하게 된 사연은 다음 기회에)
어느새 눈은 폭설이 됐다.
단동과 압록강은 안개에 가려졌다.
오후 2시.
민박집 아주머니께 길을 묻다.
"아주머니 이렇게 폭설이 오는데 어딜 가야 할까요?"(호자이)
"단동엔 왜오셨소?"
"글쎄요..."
"북한을 보러 왔다면 압록강에 가야 할테고, 중국을 보러왔다면 항미원조기념관을 가보시구려:"
아! 맞다.
조창완 선배도 말한, 바로 그 기념관.
눈도 오니, 오늘은 거기 가서 놀자꾸나.

택시를 타고 가볍게 "취, 캉메이위엔차오 지니엔관"이라고 말한다.
캉메이, 라는 말이 가볍고 듣기 좋다.
항미원조라는 말을 듣는 순간, 6.25전쟁이 떠올랐다.
아, 중국인들에게는 6.25의 명분이 바로 이 것이었구나.
전시장의 모습은 마치 평양의 현대적인 건축물을 연상케 했다.
단동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위에 자리잡은 위치가 인상적이었다.

정전협정.
우리가 잊고 있었던 바로 그 문구.
명백하게 한국인이라면 세계제 2차대전과 6.25가 만든 비극과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문제는 아직도 한반도에 전쟁이 완전하게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잊고 있던 전쟁이 엉둥하게 단동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실 요녕성 여행을 계획했을 당시에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인민해방군의 용맹스러운 표정과 기상.
벽을 뚫고 나와 금새 압록강을 건널 것만 같다.
항미원조기념관은 매우 흥미롭게 구성돼 있었다.
적잖은 전쟁기념관을 경험한 내게도 너무도 낯설고 흥미로왔다.
따져보니 6.25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기념관은 국내에 없었다.
용산의 전쟁기념관 정도인데, 단동과 비교해 보니 천양지차다.

어디서든 마오쩌둥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에 등장한 1950년의 마오와 인민해방군은
활기차 있었고, 혁명 정신으로 충만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봉건제도를 담박에 해치울 것 같이 보였고,
대신 그 사진에 등장한 조선 인민의 표정은,
너무도 가련했고, 연약했고, 무력했다.
언젠가 6.25관련 자료집에서 봤던 한 아기업은 할머니.
내 기억으로 이 할머니는 미군이 주민들에게 해를 끼쳤다는 하소연을
중국 인민해방군에게 했었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그 진위여부를 떠나,
이 기념관에 전시된 거의 모든 전시물에는 조선이란 나약한 어린이와 부녀자로 묘사가 됐다.
북한 군인에 대한 사잔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조선 인민에게 의료봉사를 하고 있는 인민해방군
예를 들어 이런식이다.
인민해방군은 철저하게 조선을 돕기 위해 전쟁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남조선 출신에서 보면 조금은 뻔뻔스럽다는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비되는 중국 여성의 당당한 사진.
사실 이 사진은 1990년대 초반 우리나라 국정 사회교과서에 실린 아주 유명한 작품이다.
예전에는 깃발에 씌여진 글자를 알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비교적 선명하게 해독이 된다.
"어머니, 우리는 조국과 평화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보위하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어쩌면 저렇게 중국 여성과 아이가 당당한 사진을 골랐는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중국 인민들은 당당하게 이 전시관을 통해 선언하고 있었다.
"중국은 중국 인민의 안전과 평화 그리고 조선의 독립을 위해 분연하게 떨쳐 일어났다."
좋게 말하면 캉메이위엔차오, 인 셈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국 대륙에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선수를 친 셈이다.

대한민국 제1사단인 수도사단의 맹호깃발.
6.25 전쟁 도중 혜산진까지 진격한 맹호부대 깃발을 노획해 이 곳에 전시하고 있었다.
이 깃발은 내게는 너무도 특별할 수 밖에 없다.
바로 나는 남조선 최강의 부대인 수도기계화보병, 일명 맹호부대 출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느낌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내가 제대한 부대의 깃발을, 중국의 단동에서 보는 기분은.
^^;
괜시리 침울해 지고 전에 없던 진지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 정말 장난이 아닌 상황이군하"

인민해방군이 조선반도에서 물러가면서,
조중우애를 기념하라는 뜻에서 북조선의 노동자들이 전달한 기념품들.
이 같은 깃발 수 백여점이 전시돼 있었다.
론리플래닛에서도 이 대목을 집중 거론하기도 한다.
"캉메이~기념관에 가면 조선어로 된 삐라와 깃발이 많다"
물론 한국인의 눈에는 그저 단순한 조선어가 아니었다.

김일성의 사진과 글귀도 적잖이 눈에 띄었다.
중국에 대한 고마움과, 조선과 중국 인민이 영원히 공존 번영하자는 내용이다.
김일성에 대한 논평의 나의 능력치를 넘어서는 대목이기 때문에 패스한다.

중국인민군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물.
각 출신 성멸 희생자 숫자가 원 위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최종 희생자는 바로, 183108........................무려 18만 3108명이 한반도에서 목숨을 바쳤다.
6.25전쟁은 중국이 치열한 내전을 끝마지고 공산당 정부를 만든지 불과 3년만에 치룬 대전쟁이었다.
신생국가였음에도 단시간에 국력을 모아내 연인원 300여만명을 조선 반도에 투입했다.
바로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을 막아서기 위함이었다.
어찌됐던 미국을 만주 이남에서 막겠다는 중국의 목표는 성공을 거뒀고,
억울하게도 한반도는 38선 근처에서 봉합이 됐다.
6.25란 어설프게 봉합됐던 동북아 정세를 다시한번 매조지 하는 전쟁이었고,
쏘련과 중국 Vs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의 강력한 맞부딪힘의 결과는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 체제로 굳어졌다.
억울한 것은 물론 우리 민족이다.
강대국들에게 고스란히 전쟁터를 제공해 준 셈이 됐고,
400여만명의 민간인과 군인들이 전쟁으로 희생됐다.
약 20만명을 희생한 중국과 미국은 비교적 확실한 대가를 챙긴 반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민족간의 치열한 갈등과, 아직도 해소되지 못한 국내의 이념 잔재.
그리고 남북한에 남은 그 후손들의 아픔들....

기념관 3층에는 마치 전쟁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게끔
조선 전쟁의 중요 포인트가 그림과 미니어처로 실감나게 전시되고 있었다.
이를 배경삼아 사진찍는 관광객들 틈바구니에서
넋을 놓고 6.25를 구경하다.

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거대한 인민군 조형물과,
마오쩌둥의 6.25 출정 명령.
이를 설명하는 안내원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아. 참.
그리고 이 기념관 역시 올림픽 이후 공짜가 됐다는 소식이다.
그 덕분인지 관람객이 눈발에도 불구하고 꽤 많았다.
물론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었다.

그리고 이 기념관 앞에는 단둥과 압록강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초거대 기념탑이 세워져 있었다.
(알고보니 이 위치는 중국인민지원군 총본부인 13병단 유지라고 한다)
높이가 53m라니 왠만한 20층 아파트 높이다.
탑 정면에 새겨진 글귀는 등소평이 쓴 글씨 란다.
그냥 돌탑이 아닌 사람이 올라갈 수 있고, 내부가 전시실로 설계된 탑이란다.
내가 간 날은 아쉽게도 문이 닫혀 있었다.
비바람으로 단동 시내가 내려보이지도 않았다.

아쉬운 김에 기념촬영 한 컷.
만감이 교차하는 기념관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중국이 앞으로도 항미원조 열심이 하면 좋겠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안했으면 더욱 이상적이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다"
어떤 국가나 자신이 참전한 전쟁에 대해서는 최대한의 미사여구를 동원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패배하지 않았다면 금상첨화다.
6.25는 중국에게 너무나 많은 명분과 실리를 준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부러운 대목은 남의 나라 전쟁에 참가하면서....
위대한 혁명정신을 수호하고,
봉건해방 정신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
그리고 국토를 보위하고
더불어 제국주의에 대항해 세계평화를 유지하고
심지어 혁명 동지인 북조선을 돕겠다는
최강의 명분들을 독식해 버린 것.
캉메이위엔차오 기념관을 나오는 순간
한국인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마도 단 두 가지일 것이다.
'초. 라. 함'
그리고 그 6.25를 전혀 몰랐다는 나의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일 것이다.
Leave your greetings here.
ㅋ 잘 다녀오셨군요. 저에게 타이뻬이는 언승욱이 마구 걸어 다니던 거리로, 암튼 꼭 가보고 싶은 곳이지만 아직 기회를 못 잡고 있네요. ^^
꼭 잘 다녀온 것은 아닌데요. 대만에서 대만 사람을 많이 못만난 게 좀 아쉽더군요. 여하튼 감사합니다.
당신 타고 있는 스트라이다도 대만의 '밍싸이클'에서 만들었을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