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의 인연을 정확하게 서술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개인적인 오해와 집착이 관계에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10년 전인 1999년 9월 모일이었다. 텍사스 오스틴 대학가 서쪽 모퉁이에 위치한 영어학원, 학원의 이름은 잊었지만 'TOFLE'전문학원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었다. 때문에 아시아계 학생들이 몰려와 토플점수를 따느라 정신 없는 뜨내기 중심 학원이기도했다. 40도에 육박하는 더운 공기, 낯선 아시아계 학생들, 오스틴은 남부 시골보다는 조금 삭막한 동네였다.

텍사스는 조금 요상한  동네였다. 한국에서 이민을 온 사람도, 도피유학을 온 이들, 혹은 계약결혼을 한 다종다양한 한국인들이 몰려왔고, 가장 먼저 영어학원에 들렀다. 2주 전, 오스틴에 도착한 나는 학원에 등록하고 멍청하게도 토플 공부를 시작했다. 그나마 가장 학구적인 모습을 보인 클래스가 토플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엉뚱했다.

일본, 대만,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서 몰려온 20대 청춘남녀들은 쉬는시간이 되면 학원 앞 정원에 몰려가 담배를 피우거나 자국어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곤 했다. 작은 키에, 전형적인 한국인의 얼굴을 한 그는 2주 늦게 등록했기 때문인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혹은 나이가 많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갓 30세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그는 홀로 담배를 피웠다. 한국인을 대표(?)해서 내가 나섰다.

"한국인이죠?"

그는 매우 외로웠나 보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빠른 말을 한 바구니 쏟아냈더랬다. 텍사스는 너무 덥다느니, 술 먹을 곳이 없어 혼자 바에 갔다는 둥, 이 학원이 굉장히 유명했다는 등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그렇게 그와 통성명을 하고 인연을 시작했다. 그와 외로운 이국땅에서 술을 함께 하고, 소주를 사고 혹은 점심을 함께 해결해가며 조금씩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는 영어를 전혀 못했다.

나이 서른. IMF를 갓 넘인 토종 한국인이 영어를 잘 하리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는 평균적 대학생과 비교할 때 심하게 부족했다. 그는 그 이유를 매우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대학 교육을 잘 못받았거든"

"(조심스럽게) 무슨 공부를 했는데요..?"(호자이)

여하튼 해외 한국인 커뮤니티에서 출신대학을 묻는 것은 아주 친해지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토로했다.

"서울대 정치과를 나왔지"

풋.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그의 20대는 꽤 충격적(?)인 것이었다. 대전출신인 그는 삼수 끝에 어렵사리 S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실력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그의 야심이 지나치게 컸던 탓이다. K대학에 합격한 적도 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니 S대학이 아니면 안되겠더란다. 그리하여 대학에 입학인 직후는 곧장 정치활동에 몰입했다.

물론, 처음부터 정치색깔을 정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좌파공부도 해보고 우파공부도 해봤는데, 그의 개인적인 철학과 집안내력, 그리고 그가 느낀 삶의 경험을 토대로 학생운동을 정립하겠다고 현장에 뛰어들었다. 첫 시도는 당시 창당된 민중당이었고, 그리고 거기서 필생의 스승인 '장기표' 선생을 만나게 됐다.

장 선생과의 인연은 매우 깊고 오래지속됐나보다. 그는 장 선생을 거의 아버지 같이 모시며 그의 철학과 사항 그리고 인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그리고 그는 민중당 운동의 실패를 교훈삼아 곧장 서울대 경실련 모임을 주도해 나갔다. 점차 좌파가 아닌 우파 쪽으로 발길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제 민중당과 경실련 사람들은 자연스레 한나라당으로 집결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을 아꼈다

2~3개월이 지나도록, 아마도 소주를 십여차레 마시고도 그는 베일에 싸인 존재였다. 한가지 독특한 점은 그의 사람 사귐 방식이었다. 내 또래 사람들은 좀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그를 배척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는 그의 장점을 살려주고 개화(?)주기 위해 열심이었다. 특히 미국에서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일반인의 시각으로 보면 조금 독특한(?) 사람들이 많았다. 속칭 루저도 있었고, 한국사회에 적응 못하고 도망친 이들도 없지 않았기에, 그의 행보는 더욱 놀라웠다.


당시 사진 한장.  

more..



그와 다시 인연이 시작된 계기는 조금 혼란스럽다.
2001년이었을까. 그가 여의도 연구소로 복귀한 2002년이었을까?

어쨌든 그는 언제나 밤을 새워 끊임없이 무슨 보고서 같은 것을 써댔다. 야당의 중진의원이었는지, 혹은 실력자 A씨였는지, 혹은 모 기업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정치커뮤니케이션 전공 교수들과 세미나를 하고, 여론조사기관 전문가들과 토론을 하고, 때론 기업의 핵심 멤버들과도 교분을 유지하며 2002년 시기를 버텨냈다.

또 한번의 선거 패배.

노무현 정권 시기의 야당생활은 지독히도 힘들었다. 내가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였기 때문에 그의 참여정부 5년은 비교적 정확하게 기억한다. 매우매우 힘들었지만, 야당의 힘은 만만치 않았기에 꾸준하게 일감을 찾아 식견을 키워냈다. 그는 한 통신업체에서, 혹은 J일보에서 결국은 MB의 참모로 단계단계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그리고 결국 5년을 버텨내 MB의 창업공신이 됐다. 다시금 정권인수위원회, 전쟁, 그리고 권력투쟁, 끝내는 그가 그렇게도 바라마지 않던 서울지역 '공천'까지 따내게 됐다.

그는 자신의 공천이 확정되는 날 내게 짧은 메시지를 전했다.

"공천장 받아왔다. 정말 힘들었다. 이기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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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을 지역에 내걸린 그의 현수막. 그는 "MB특사"라는 조금 철지난 화두를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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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도 이제 40이 됐다.

까까머리 어학연수생이 최연소에 가까운 여당 지역구 공천장을 받아낸 것이다. 물론 1차적으로 그의 탁월한 분석력과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복잡한 문제를 간략명료하게 요약해 내는 시스템 적인 사고가 윗분들로부터 높은 쓰임새를 인정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2차적인 그의 삶의 본능은 다름아닌 '정치에 대한 욕구'였다. 그의 정치적 본능은 때론 무섭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실'적이었고 '실용'적이었다.

"너는, 직원들 밥을 먹일 걱정을 하는 CEO의 맘을 모른다"

"MB의 탈법? 이 사람아,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해야 하는되는 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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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영어를 마스터 하셔서 앨 고어까지 만나셨는지..., 그의 사무실에는 앨고어와 만났다는 조금은 오래된 방식의 홍보 플래카드가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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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는 마라톤 매니아다. 독하게 맘을 먹고 살을 20kg이나 빼기도 했다.


꽤 썰렁한 얘기를 지껄이고 말았는데, 결론은 대략 두 세개다.

1.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의 정치행치 행보는 이미 젊은 시절 결정이 돼 있었다는 것
1. 그리고 입신양명의 의지와 정치적 야망은 꽤 일찍 형성된다는 점이다.


정치인이란 과연 누가되는 것일까?

그가 이번 선거에서 본격적인 정치인으로 데뷔할 수 있을까?

사실 가장 첨예한 관심사 하나다.
Posted by hoj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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